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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영화를 보러 갔다가 극장을 나오며 한동안 말을 잃은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2019년 10월, 조커를 보고 나서 딱 그랬습니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라기에 큰 기대 없이 자리에 앉았는데, 영화가 끝날 때쯤 제가 보고 있던 건 악당의 탄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무너짐이었습니다. 아직도 극장 밖을 걸으며 느꼈던 그 먹먹함이 생생합니다.
화려한 악당 대신 마주한 고담의 현실
사실 저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배트맨과 싸우는 화려한 빌런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원한 액션을 기대하며 들어갔는데, 첫 장면부터 완전히 다른 영화가 펼쳐졌습니다.
광대 분장을 한 아서 플렉이 거울 앞에서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장면. 땀에 번진 눈 화장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제 가슴 한쪽이 쿡 찔렸습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했던 날,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해야 했던 날이 떠올라서였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1981년 고담시티는 단순한 가상의 도시가 아닙니다. 쓰레기가 산처럼 쌓이고 쥐 떼가 들끓는 이 도시는 당시 실제 뉴욕의 모습을 참고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고담시티란 극도로 불평등하고 부패한 사회 구조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아서의 비극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처음부터 암시합니다. 감독 토드 필립스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이 도시를 설계했다고 밝혔습니다.
아서는 광대 일을 하며 몸이 약한 어머니를 돌보고, 언젠가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살아갑니다. 불량배에게 광고판을 빼앗기고 봉변을 당했는데도 사장은 오히려 광고판 값을 월급에서 깎겠다고 호통을 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억울해도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제 경험들이 겹쳐져 주먹을 꽉 쥐게 됐습니다.
- 1981년 고담시티: 실제 뉴욕의 열악한 도시 환경을 모델로 설계된 배경
- 아서 플렉의 직업: 광대 아르바이트, 어머니 부양, 코미디언의 꿈이 공존
- 사회적 맥락: 복지 예산 삭감, 빈부 격차, 무관심한 시스템이 서사의 뼈대
호아킨 피닉스가 만들어낸 아서 플렉의 균열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건 단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입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 봐도, 화면 안에서 '연기'라는 걸 잊게 되는 순간이 생기거든요.
아서에게는 감정과 무관하게 갑자기 웃음이 터져 멈추지 않는 증상이 있습니다. 이를 가성 구근 정동(Pseudobulbar Affect, PBA)이라고 합니다. PBA란 뇌 손상이나 신경계 질환으로 인해 감정과 전혀 다른 웃음이나 울음이 통제 없이 터져 나오는 신경학적 증상을 의미합니다(출처: 미국 국립신경질환·뇌졸중연구소(NINDS)). 버스에서 아이를 웃겨주려다 엄마에게 핀잔을 듣고 웃음이 터져버려 양해를 구하는 작은 카드를 조심스럽게 내미는 장면, 저는 그 장면에서 웃고 있지만 누구보다 괴로워 보이는 그 얼굴에 한참 머물렀습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역할을 위해 23kg 이상 체중을 감량했습니다. 앙상한 몸으로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표정을 지을 때, 그게 연기라는 사실이 자꾸 뇌리에서 지워졌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배우의 신체적 변화가 연기의 깊이를 강제로 밀어 올리는 걸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실감했으니까요.
원래 각본에 없던 공중화장실 즉흥 댄스 장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음악을 듣고 직접 제안해서 만들어진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섭다는 감정과 슬프다는 감정이 동시에 밀려오는, 영화를 보면서 처음 느껴본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나중에 즉흥으로 만들어진 장면이었다는 걸 알고 다시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피닉스는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 발표를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서 플렉의 서사가 지금도 불편하게 남는 이유
영화 후반부, 아서는 아캄 정신병원의 기록을 통해 자신이 입양된 아이였으며, 어린 시절 방치와 학대 속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캄 정신병원이란 조커 세계관에서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는 시설로, 아서의 과거가 온전히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외면당해 왔음을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어머니가 아서를 '해피(Happy)'라고 불렀던 이유가 아이가 늘 웃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대목에서 저는 결국 눈물이 났습니다. 행복하라는 뜻인 줄 알았던 그 애칭이 사실은 가장 아픈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반전. 이렇게 잔인한 설정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웃 소피와의 관계가 전부 아서의 상상이었다는 것도 제가 직접 보고 나서 한동안 멍했던 부분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도 그 행복이 진짜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아서와 함께 속은 기분이었고, 그래서 더 허탈하고 아팠습니다.
계단 장면의 대비는 이 영화에서 가장 영리한 연출 중 하나입니다. 영화 내내 지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올라가던 그 긴 계단을, 후반부에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내려갑니다. 화면은 너무 신나 보이는데, 제 마음은 이상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그토록 애쓰며 올라가던 인생을 한순간에 내려놓아 버리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조커와 배트맨이 같은 날, 같은 혼돈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군중의 환호 속에서 아서가 입가의 피로 웃는 입매를 그리며 두 팔을 벌리는 장면은, 첫 장면에서 손가락으로 억지 미소를 만들던 모습과 겹쳐졌습니다. 평생 웃지 못했던 사람이 마침내 스스로 웃는 얼굴을 완성하는 순간처럼 보였는데, 그 웃음이 전혀 기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그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슬펐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조커 영화는 실제 배트맨 세계관이랑 연결되나요?
A. 연결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 어린 브루스 웨인과 그의 부모가 등장하며 배트맨 탄생 신화와 접점을 맺습니다. 다만 이 영화는 DC 확장 유니버스(DCEU)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기존 배트맨 영화들과 직접적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조커 자체의 이야기로 감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Q. 조커 영화에서 어디까지가 아서의 상상인가요?
A. 영화는 끝까지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소피와의 관계가 상상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나서, 마지막 정신병원 장면까지 포함해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해석이 엇갈립니다. 저도 극장을 나와 집에 가는 내내 장면들을 되짚었는데, 이 모호함이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 호아킨 피닉스가 체중을 얼마나 뺐나요?
A. 23kg 이상을 감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앙상한 몸으로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연기를 하는 장면들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습니다. 신체적 변화가 연기의 설득력을 그대로 밀어 올린다는 걸 이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Q. 조커 영화, 무거운 분위기라 보기 망설여지는데 볼 만한가요?
A.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닙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보고 나서도 한동안 기분이 가라앉습니다. 다만 그 불편함이 무언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다시 봐도 여전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입니다.
결론
조커는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생각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코미디였다는 아서의 대사를 들으며,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자연스럽게 겹쳐졌습니다. 그 무게감이 극장을 나온 뒤에도 오래 남았습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혹은 그냥 지나쳐버린 외면이 누군가에게는 벼랑 끝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너무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아직 조커를 보지 않으셨다면,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불편하더라도 끝까지 보고 나면, 분명 극장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보기 전과 달라져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