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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8일,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로건은 슈퍼히어로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에 오른 작품입니다. 제가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히어로 영화가 아카데미 후보라니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쇠퇴 — 늙고 병든 울버린이 낯설었던 이유
영화의 배경은 2029년입니다. 뮤턴트, 즉 돌연변이 초능력자가 거의 사라진 세상입니다. 쉽게 말해 25년 동안 새로운 돌연변이가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은 세계가 배경입니다. 그 세계에서 로건은 리무진 기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첫 장면부터 제가 받은 충격은 꽤 컸습니다. 차 바퀴를 훔치려는 불량배들과 맞서는 로건의 클로가 제대로 펴지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클로란 로건의 손가락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아다만티움 합금 발톱으로, 이 시리즈에서 그의 가장 상징적인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 발톱 하나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상처도 예전처럼 빠르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다리를 절고, 백발이 섞인 수염에, 기침을 달고 사는 로건의 모습은 제가 알던 울버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로건이 몰래 구한 약으로 찰스 자비에 교수를 돌보며 선시커(Sunseeker)라는 요트를 사서 둘이 바다 위에서 조용히 살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는 설정이 처음엔 좀 뜬금없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소박함이 이 캐릭터가 짊어진 피로감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구해온 사람이 결국 원하는 건 조용한 배 한 척이라는 게, 너무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신을 가졌던 프로페서 X는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려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텔레파시(telepathy), 즉 타인의 정신에 직접 접촉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오히려 그를 가장 위험한 존재로 만든 아이러니가, 이 영화가 히어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잘 압축해 줍니다.
- 아다만티움: 로건의 뼈와 발톱을 감싼 가상의 금속 합금. 이 영화에서는 그 금속이 오히려 로건의 몸을 서서히 갉아먹는 독소로 작용합니다.
- 재생 인자(healing factor): 울버린의 핵심 능력으로, 어떤 상처도 빠르게 회복하는 능력입니다. 로건에서는 이 능력이 현저히 약해진 상태로 등장합니다.
- 텔레파시: 프로페서 X의 능력. 치매로 인해 통제력을 잃자 오히려 주변인을 마비시키는 위협이 됩니다.
로드무비 — 서툰 가족의 쫓기는 여정
간호사 가브리엘라가 로라라는 어린 소녀를 북쪽의 에덴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움직입니다. 저는 이 로드무비적 구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쫓기는 여정이라는 설정 자체는 장르적으로 흔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세 사람의 관계가 달랐습니다.
로라는 트랜시젠(Transigen)이라는 기업의 실험실에서 로건의 유전자를 이식받아 만들어진 소녀입니다. 여기서 트랜시젠이란 뮤턴트 아이들을 실험체로 키워 군사 무기화하려 했던 기업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로건의 딸인 셈인데, 처음엔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이 아이가 손과 발에서 클로를 꺼내며 무장한 어른들을 상대로 싸우는 장면에서 극장 안이 술렁였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휴게소에서 처음 보는 과자를 마음대로 집어 먹고 꽃무늬 선글라스를 쓴 로라, 호텔방에서 옛날 서부 영화 셰인(Shane, 1953)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찰스, 그리고 그 둘을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챙기는 로건의 모습은 어딘가 서툰 할아버지와 아빠와 딸 같았습니다. 이 장면들이 감동적이라고 느끼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감동보다 불안함을 먼저 느꼈습니다. 너무 따뜻해지면 반드시 무너지는 게 이 장르의 문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불안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먼슨 가족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날 밤, 찰스는 오랜만에 행복했다며 눈물을 흘립니다. 1년 전 자신의 발작 때문에 소중한 제자들을 잃었다는 기억이 돌아온 것입니다. 로건이 그 사실을 찰스에게 줄곧 숨기며 곁을 지켜왔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저는 정말 목이 메었습니다. 로건이 찰스를 돌본 방식은 보호가 아니라 용서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장 — 처음으로 누군가 곁에서 떠나는 마음
찰스를 잃은 뒤 로건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고장 난 트럭을 삽으로 마구 내리치다 쓰러지는 장면은, 슬픔을 표현할 언어가 없는 사람이 몸으로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은 배우의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공허하게 느껴지는데, 휴 잭맨은 그 무게를 온몸으로 소화해 냈습니다. 17년이라는 시간이 그 장면 안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 있던 에덴에서 잠든 로건의 수염을 몰래 옛날 울버린 모양으로 다듬어 놓고 깔깔대는 장면은, 무거운 영화 안에서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온기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국경을 넘으려는 아이들을 트랜시젠 용병들이 쫓기 시작하자, 혼자 남겨졌던 로건은 결국 그 숲으로 뛰어듭니다. X-24는 로건의 젊은 복제 인간(clone)입니다. 여기서 복제 인간이란 기존 개체의 유전자를 그대로 복제해 만들어낸 인공 존재를 의미하며, 트랜시젠은 로건의 전성기 능력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이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과 싸워야 한다는 설정은 지금 생각해도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처절한 싸움 끝에 치명상을 입은 로건의 손을 꼭 잡은 로라에게, 로건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저들이 만든 대로 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울먹이며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는 로라의 말에 로건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며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언제나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만 했던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 곁에서 떠나는 마음을 알게 되는 이 장면에서, 저는 숨을 죽이고 영화에 집중했습니다. 히어로 영화를 보며 이렇게까지 먹먹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숲 속에 로건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로라는 셰인의 대사를 떠올리며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려는 순간, 다시 돌아온 로라가 무덤 위의 십자가를 기울여 X자 모양으로 꽂아두고 친구들을 따라 떠납니다. 아무 말 없이 그 작은 행동 하나로 한 시대의 영웅을 배웅하는 이 연출은, 지금 떠올려도 소름이 돋습니다. 로건은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출처: 미국 아카데미 영화예술과학원)에 오른 데 이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되었으며,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약 6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약 217만 명의 관객을 모았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자주 묻는 질문
Q. 로건은 청소년 관람불가인가요? 잔인한 장면이 많나요?
A. 네, 국내 기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입니다. 클로를 이용한 액션 장면이 꽤 거칠고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잔인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처절함이 오히려 로건이라는 인물이 짊어진 무게를 더 깊이 전달하는 장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마음의 준비는 필요합니다.
Q. 엑스맨 시리즈를 안 봐도 로건을 즐길 수 있나요?
A. 시리즈 전체를 알면 감정선이 더 깊이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로건은 독립적인 로드무비 구조로 짜여 있어서, 사전 지식 없이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히어로 영화를 잘 모르는 분도 감동적이었다는 반응이 많다는 점에서, 저도 굳이 선행 감상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Q. 로라(X-23)는 이후 다른 영화에도 나오나요?
A. 로라는 만화 원작에서 X-23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캐릭터입니다. 영화 로건 이후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체계 안에서 후속 등장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제가 글을 쓰는 시점까지 공식적으로 확정된 작품은 없습니다. 다만 로건의 엔딩이 캐릭터에게 충분한 여지를 남겨둔 것만은 분명합니다.
Q. 영화 속에 나오는 서부 영화 셰인은 실제 영화인가요?
A. 네, 셰인(Shane)은 1953년에 실제로 개봉한 클래식 서부 영화입니다. 총잡이가 은퇴 후 마지막으로 선택을 내리는 이야기로, 로건의 서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이 영화를 오마주로 선택한 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로건의 퇴장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졌습니다.
결론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저는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늘 강하고 거칠기만 했던 울버린이 사실은 누구보다 가족을 원했던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가족을 얻었다는 것을 보며 한 시대가 끝났다는 아쉬움과 함께 묘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영웅의 화려한 승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쓸쓸하고도 따뜻한 퇴장을 그려낸 영화, 저에게 로건은 그런 작품입니다. 히어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도, 한 사람의 긴 삶이 어떻게 마무리될 수 있는지를 보고 싶다면 충분히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